겐무 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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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무 신정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시작된 정치 개혁이다. 천황 친정을 목표로, 율령제 부활, 중앙 및 지방 통치 기구 개편, 군사 제도 정비, 종교 정책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귀족 중심의 정책, 토지 소유권 문제 해결 실패, 무사 계급의 불만 고조 등으로 인해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후 남북조 시대를 거쳐 무로마치 막부 시대로 이어진다. 겐무 신정은 무로마치 막부의 군사 제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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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명칭 | 겐무 신정 |
공식 명칭 | 건무신정(建武新政) |
로마자 표기 | Kenmu no shinsei |
시작 연도 | 1333년 |
종료 연도 | 1336년 |
이전 국가 | 가마쿠라 막부 |
이전 국가 깃발 | Sasa Rindo.svg |
이전 국가 경계 | no |
이전 국가 2 | 교토의 일본 황실 |
이전 국가 2 깃발 | Imperial_Seal_of_Japan.svg |
이전 국가 2 경계 | no |
후임 국가 | 아시카가 막부 |
후임 국가 깃발 | Ashikaga_mon.svg |
후임 국가 경계 | no |
후임 국가 2 | 북조 |
후임 국가 2 깃발 | Imperial_Seal_of_Japan.svg |
후임 국가 2 경계 | no |
후임 국가 3 | 남조 |
후임 국가 3 깃발 | Imperial_Seal_of_Japan.svg |
후임 국가 3 경계 | no |
시작 사건 | 겐코의 난 시작 |
종료일 | 2월 23일 |
종료 사건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점령 |
주요 사건 | 가마쿠라 포위전 |
주요 사건 날짜 | 1333년 5월 18일 |
수도 | 헤이안쿄 |
정치 체제 | 전제 군주제 |
국가 지도자 직책 | 일본 천황 |
국가 지도자 | 고다이고 천황 |
국가 지도자 재임 기간 | 1318년–1339년 |
대표 직책 | 쇼군 |
대표 1 | 모리요시 친왕 |
대표 2 | 나리나가 친왕 |
대표 1 재임 기간 | 1333년 |
대표 2 재임 기간 | 1335년–1336년 |
종교 | 신불습합 |
공용어 | 중세 일본어 |
통화 | 료 |
정부 | |
정부 명칭 | 건무정권 |
배경색 | #dc143c |
경계 | 중앙 |
이미지 | Flag of the Japanese Emperor.svg |
이미지 설명 | 국화 문양은 일본 천황가의 문장. 사진은 천황기이다. |
설립일 | 겐코 3년/쇼케이 2년 (1333년) |
해산일 | 엔겐 원년/겐무 3년 (1336년) |
대표 | 고다이고 천황 |
정청 소재지 | 야마시로국 헤이안쿄 (현: 교토부 교토시) |
이후 정부 | 북조 → [[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0px]] 북조 → 남조 [[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0px]] 남조 |
중앙 | 태정관 신기관 영외관 잡소결단소 기록소 검비위사청 무자소 와소 |
지방 | 다자이후 무쓰장군부 가마쿠라장군부 슈고 고쿠시 |
기타 정보 | |
겐무 정권 붕괴 후 | 고다이고 천황은 남조를 성립시키고 남북조 시대가 된다. |
2. 역사적 배경
천황의 권력은 1192년 미나모토씨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쇼군(将軍) 칭호를 얻어 가마쿠라 막부를 열면서 약화되었다. 이후 호조씨 가문이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실권을 장악했다.[2]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두 계통이 번갈아 즉위하는 양통질립(両統迭立) 상태가 이어졌다.[2] 이러한 상황에서 남조 출신의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즉위하여 막부 타도를 시도하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면서 막부와의 갈등이 깊어졌다.[2] 1331년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을 유배 보냈으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같은 충신들이 천황을 지지하며 저항을 계속했다.[2]
결정적으로 막부 타도를 위해 파견되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또 다른 유력 무사 닛타 요시사다가 막부를 배신하고 천황 측에 가담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2] 닛타 요시사다는 군대를 이끌고 막부의 수도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여러 전투 끝에 1333년 가마쿠라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로 돌아와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기반이 마련되었다.[2]
2. 1.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가마쿠라 시대 후기, 가마쿠라 막부는 호조 도쿠소(得宗) 가문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내관령(内管領)인 나가사키씨가 장악하고 있었다.[2] 원나라의 침공 이후 정국 불안 속에서 악당(悪党)이라 불리는 무장 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막부는 점차 무사 계급의 지지를 잃어갔다. 한편, 조정에서는 다이가쿠지 왕통(大覚寺統)과 지묘인 왕통(持明院統)이 대립하며 교대로 황위를 계승하는 양통질립(両統迭立)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2]1318년 다이가쿠지 왕통의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했다. 그는 헤이안 시대의 다이고 천황과 무라카미 천황의 치세인 엔기·덴랴쿠의 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삼아 천황 중심의 정치를 복원하고자 했다.[2] 그러나 황위 계승 문제로 인한 양 왕통의 대립으로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자, 고다이고 천황은 황통을 자신에게 일원화하고 무사 정권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은밀히 계획했다.[2] 그와 그의 조언자들은 막부를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다.[2]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계획은 1324년 쇼추의 변(正中の変)과 1331년 겐코의 난(元弘の変)으로 두 차례 발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히노 스케토모, 하나야마인 모로카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등 측근들이 희생되었다. 겐코의 난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체포되어 오키 제도(隠岐島)로 유배되었고, 막부는 지묘인 왕통의 고곤 천황(光厳天皇)을 즉위시켰다.[2]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의지에 호응하는 세력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가와치의 구스노키 마사시게,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 하리마의 아카마쓰 노리무라 등이 각지에서 막부에 대항했다.[2] 결정적으로 막부 측 고케닌(御家人)으로 반란 진압에 참여했던 유력 무사 닛타 요시사다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를 배신하고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2] 특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반란 진압 명령을 받고 교토로 파견되었으나, 오히려 막부에 반기를 들고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했다.[2]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제도를 탈출하여 호키국(伯耆国) 센조산(船上山)에서 나와 나가토시 등의 도움을 받아 거병하자, 이에 호응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를 함락시켰다. 한편, 닛타 요시사다는 군대를 이끌고 가마쿠라로 진격했다. 닛타 군은 고테사시하라 전투, 구메가와 전투, 부바이가와라 전투 등에서 막부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가마쿠라를 함락시키고 호조 다카토키를 비롯한 호조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했으며,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귀환하여 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2. 2. 신정의 시작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와 광엄천황의 즉위를 무효로 하고 정경 연호도 폐지하였다. 광엄 천황이 내린 칙서와 관직 역시 무효로 선언되었다.[2] 심지어 고다이고 천황 자신이 임명했던 관백 다케다 후유노리마저 해임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후미코지자카의 별궁에 머물며, 자신의 복위(중조)를 인정하지 않고 분포 2년(1318년)부터 계속 재위해왔음을 주장하며 친정을 시작했다.[2]그러나 교토에서는 이미 로쿠하라 단다이 공격을 주도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각지에서 상경한 무사들을 규합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카우지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모리요시 친왕은 나라의 시기산을 거점으로 삼아 다카우지를 견제하려 했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타협책으로 6월 13일, 모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했다.[3][5][6] 다카우지는 스스로 미나모토씨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막부 권력의 복원자라고 여겼기에[2], 모리요시 친왕의 임명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는 로쿠하라 단다이가 함락되자 즉시 교토에 자신의 봉행소를 설치하여 치안 유지 기능을 인수하고, 도로 통행 통제, 여권 발급 등 기존 막부 부관(로쿠하라 단다이)의 권한을 행사하며 무사 계급의 정치적 권력 유지를 관철하려 했다.[2] 이러한 행보로 다카우지는 구 막부 체제를 지지하는 무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2]
신정부는 6월 15일 구령회복령(旧領回復令)을 시작으로 사찰 영지 몰수령, 조적(朝敵) 소유지 몰수령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는 기존의 토지 소유권 관행(예: 고성패식목에서 인정된 지교 연기법)을 일시적으로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 소유권 확인 및 소송 신청에 천황의 재결 문서인 윤지(綸旨)를 받도록 요구하는 급진적인 조치였다.[2] 그러나 토지 소유권 확인 신청이 쇄도하여 행정 처리가 마비되자, 7월에는 결국 제국 평균 안도령(諸国平均安堵令)을 발표하여 사실상 이전 명령을 철회했다. 이 명령은 조적의 범위를 호조씨 일족으로 한정하고 지교의 안도(소유권 확인)를 각 국사에게 위임하는 내용이었다. 토지 문제는 신정 초기부터 심각했지만, 막부 타도에 공을 세운 서일본 무사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해결은 어려웠다.[2]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역시 쇼엔 제도가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으나, 현실적으로 폐지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2]
8월 5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휘 '다카하루'(尊治)에서 한 글자를 받아 '다카우지'(尊氏)로 개명했으며, 이후 진수부장군에 임명되었다. 한편,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천황의 명령 없이 고다이고 천황의 다른 아들인 나리요시 친왕을 데리고 가마쿠라로 가서 그를 고즈케국의 국사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관으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2][4] 이는 무사 계급이 문민 통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2]
신정부는 기록소(記録所), 은상방(恩賞方), 9월에는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 등 새로운 통치 기구를 설치했다.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10월에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그의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진수부장군 겸 무쓰노카미)가 노리나가 친왕을 모시고 무쓰국으로 파견되어 무쓰 장군부(陸奥将軍府)를 설립했다. 12월에는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나리요시 친왕을 모시고 가마쿠라로 파견되어 가마쿠라 장군부(鎌倉将軍府)를 열었다.
겐코 4년이자 겐무 원년인 1334년 정월에는 쓰네요시 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연호를 '겐무'(建武)로 고쳤다. 새로운 화폐인 저폐(楮幣), 즉 '건곤통보'(乾坤通宝) 발행도 계획되었으나 실제로 유통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 신정은 복잡한 토지 문제, 쇄도하는 소송 및 은상 청구, 신설 기관 간의 권한 충돌 등으로 인해 출범 초기부터 심각한 혼란을 겪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2. 3. 신정의 와해
고다이고 천황은 동국 통치를 위해 쇼군을 파견하는 대신 자신의 아들인 노리나가 친왕을 무쓰(陸奥) 국과 데와(出羽) 국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2] 이에 맞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천황의 허가 없이 다른 아들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데려가 고즈케(上野) 국 국사로 삼고, 자신은 부관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2][4] 이는 무사 계급이 문민 통치에 순응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였다.[2]
이후 고다이고 천황이 모리나가 친왕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하자, 무사 계급의 통치권을 주장하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3][5][6] 다카우지는 자신이 미나모토 씨의 분가인 아시카가 가문 출신으로서 막부 권력을 회복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겼다.[2] 그는 이미 로쿠하라 단다이가 함락된 직후 교토에 자신의 무교(奉行)소를 설치하여 치안 유지 등 기존 막부의 기능을 장악하고 있었다.[2] 이러한 행보를 통해 다카우지는 무사들의 지지를 얻으며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2]
모리나가 친왕은 다카우지의 권력 장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2]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모리나가 친왕 주변에는 닛타 요시사다 등 다카우지에 반감을 가진 세력이 모여들었다.[2] 긴장이 고조되던 중, 다카우지는 구실을 만들어 모리나가 친왕을 체포하여 교토에 가두었다가 가마쿠라로 이송했다.[5] 1335년, 가마쿠라에서는 호조(北条) 씨 잔당들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2] 마지막 섭정(執権)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토키유키가 막부 부활을 외치며 거병하여 무사시(武蔵) 국(현재의 가나가와현)에서 다다요시 군을 격파하는 사건(나카센다이의 난)이 발생했다.[4] 다다요시는 가마쿠라에서 도주하기 전, 모리나가 친왕의 처형을 명령했고,[5] 가마쿠라는 일시적으로 토키유키의 수중에 들어갔다.[4]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해달라고 천황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2] 이에 다카우지는 천황의 허락 없이 군대를 이끌고 가마쿠라로 진격하여 호조 토키유키를 격파했다.[4] 이후 그는 교토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가마쿠라에 머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옛 거처였던 오쿠라(大倉)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2][7] 또한 천황의 허가 없이 독자적으로 고즈케(上野) 국 수령에 우에스기 씨 일족을 임명하는 등[2] 노골적으로 신정(新政)에 반기를 들었다.
1335년 말, 교토 조정은 다카우지 토벌군을 준비했고, 다카우지 측도 코노 모로나오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2] 11월 17일,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의 이름으로 전국의 무사들에게 닛타 요시사다 토벌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2] 조정 역시 각지의 무사들에게 요시사다를 도와 아시카가 형제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무사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 줄 인물로 다카우지를 지지했으며, 농민들 사이에서도 막부 시대가 더 나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2] 결국 전투는 아시카가 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1336년 2월 23일 닛타 요시사다와 천황군은 패배하여 교토가 함락되었다.[2] 이틀 뒤인 2월 25일,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입성하면서 겐무 신정은 막을 내렸다.[2]
신정 붕괴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이후 일본은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초기에는 남북조 시대의 전란이 계속되었고, 15세기 이후로는 전국 시대가 되면서 교토 주변 이외의 실효 지배력을 상실했지만, 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쫓겨날 때까지 아시카가 씨 15대에 걸친 무가 정권이 지속되었다.
3. 겐무 신정의 정책
1318년 즉위한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의 간섭 없이 직접 통치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2] 그와 측근들은 조정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가마쿠라 막부를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다.[2]
겐무 신정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쇼엔(荘園)을 둘러싼 복잡한 토지 소유 문제였다.[2] 당시 수호(守護)나 지토(地頭)와 같은 강력한 지방 영주들은 정치적 독립성과 면세 특권을 누리며 중앙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고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었다.[2] 고다이고의 핵심 참모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는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기존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다.[2] 더욱이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 타도에 공을 세운 서부 지방의 쇼엔 기반 무사들과의 관계 때문에 토지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웠다.[2] 결국 토지 소유 문제는 신정 기간 내내 해결되지 못한 채 불안 요소로 남았다.[2]
고다이고 천황은 과거 황실이 소유권을 잃었던 일부 영지를 회복하고, 도지(東寺)나 다이토쿠지(大徳寺) 같은 유력 사찰에 영지를 보상하며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2]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작농이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불만이 커지기도 했다.[2]
특히 무사 계급에 대한 정책은 신정 실패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무사 계급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막부 타도에 공을 세운 하급 무사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2] 몰수한 호조씨의 영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같은 고위 무사들에게는 막대한 보상이 돌아갔지만, 다수의 하급 무사들은 소외되었다.[2] 은상 수여를 위해 설치된 재판소는 경험 부족과 부패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2] 여기에 더해 고다이고 천황이 궁궐 건축 자금 마련을 위해 무사 계급에게 추가 세금을 부과하면서 불만은 극에 달했다.[2] 태평기(太平記)에는 다카우지와 요시사다가 큰 보상을 받았음에도, 50개가 넘는 구니(国)의 수호(守護)와 지토(地頭) 직책이 귀족이나 궁정 관료에게 돌아가 무사들에게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결국 1335년 말에는 무사 계급 전체가 신정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2]
고다이고 천황은 "지금의 관례는 옛날의 새로운 방식이다. 짐의 새로운 방식은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라는 말처럼 기존의 틀을 깨는 개혁을 추구했다. 인세이(院政)를 실시하지 않고 섭정이나 관백도 두지 않았으며, 정이대장군 역시 고료 친왕을 잠시 임명했을 뿐 공석으로 두는 등 천황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과 인사 등용 방식은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1335년에는 신정을 풍자하는 『니조가와라 낙서』(二条河原の落書)가 등장했고,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거병 전 상소를 통해 신정의 실패를 지적했으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나 여러 공가의 일기에도 신정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무사나 서민뿐만 아니라, 고다이고를 지지했던 공가 세력 내부에서도 신정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겐무 신정의 정책 중에는 후대에 영향을 미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대표적으로 공가령(公家領)의 분할을 제한하고 가독(家督), 가기(家記), 저택 등 '가문'(家門)과 소령(所領)인 '가령'(家領)을 일괄적으로 안도하여 적장자에게 계승시키는 원칙을 세운 것은 이후 무로마치 막부 시대까지 이어지며 공가 상속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85] 또한, 과거에는 급진적인 악정으로 평가받던 것과 달리, 20세기 후반 이후의 연구에서는 잡소결단소 운영이나 관위 수여 방식 등 겐무 신정의 법 제도가 가마쿠라 시대의 제도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킨 측면이 있으며,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 '선례'로서 계승된 요소가 많다는 점이 재평가받고 있다.
신정 초기,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 타도의 일등 공신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크게 중용했다. 다카우지에게는 자신의 이름 한 글자인 '尊'을 하사하여 '尊氏'라는 이름을 쓰게 했고,[17] 막대한 토지(30곳)와 여러 구니의 수호직, 정삼위 참의를 비롯한 높은 관직을 수여했다. 다카우지는 형식적인 우대뿐만 아니라, 은상방(恩賞方) 운영에 관여하고 전공 인정을 처리하는 등 정권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진수부장군으로서 실질적인 군사 최고 책임자 지위를 가졌다. 이러한 중용은 과거 『매송론』 등의 기록 때문에 다카우지가 정치 중추에서 배제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부정되고 있다.
인사 정책에서는 구란도(蔵人) 등 실무 관료는 아버지 고우다 천황 시대의 인사를 상당 부분 계승하여 안정성을 도모했으며, 상경(上卿) 등 고위직에는 기존 세력 외에도 능력에 따라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을 등용했다. "후의 삼방"이라 불린 요시다 사다후사, 만리코지 노부후사,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를 비롯해 지쿠사 다다아키, 보몬 기요타다 등 공가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나와 나가토시, 유키 지카미쓰 등 무가 인물, 심지어 진언종 승려인 분칸, 엔칸 등 비(非)공가 출신까지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가문 배경에 얽매이지 않는 인사를 시도했다.
3. 1. 중앙 정치 기구
교토로 돌아온 후고다이고 천황은 광엄 천황의 즉위를 무효로 하고 정경 연호를 폐지했으며, 광엄 천황이 임명한 관직 등도 모두 무효화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임명했던 관백 다케다 후유노리(鷹司冬教)마저 해임하며 강력한 친정 의지를 보였다.천황 중심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추진되었다. 6월 15일 구령회복령을 시작으로 사찰 영지 몰수령, 조적(朝敵) 소유지 몰수령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는 기존의 토지 소유 관계를 천황의 윤지(綸旨)를 통해 새롭게 인가받도록 한 조치였으나, 신청자가 폭주하여 행정 마비를 겪자 7월에는 사실상 이를 철회하는 제국 평균 안도령을 내리기도 했다.
중앙 정치 기구로는 기존의 기록소(記録所)를 부활시키고, 새롭게 은상방(恩賞方)과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 9월 설치)를 설치하여 행정 및 사법 기능을 강화하고자 했다. 잡소결단소는 이후 소송 절차에 관한 10개 조항을 제정하기도 했다. 율령제적 질서를 일부 복원하려는 시도로 1334년 12월에는 팔성경(八省卿)을 새로 임명했는데, 이때 가문의 격식보다는 실력을 중시하는 인사가 이루어져 기존 질서에 변화를 주려는 의도를 나타냈다.
지방 통치를 위해서는 10월에 키타바타케 친부(北畠親房)와 그의 아들 키타바타케 아키에(北畠顕家)를 기요라 친왕과 함께 무쓰국에 파견하여 무쓰 장군부(陸奥将軍府)를 세웠고, 12월에는 존씨의 동생 아시카가 나오요시(足利直義)를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과 함께 가마쿠라에 보내 가마쿠라 장군부(鎌倉将軍府)를 성립시켰다.
또한 화폐 개혁의 일환으로 "건곤통보"(乾坤通宝)라는 새로운 지폐 발행을 시도했으나 실제 유통되지는 못했다. 1334년 5월에는 본가와 령가 직을 폐지하고, 덕정령과 관사 해방령을 발포하여 기존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은 천황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으나, 급진적인 정책 추진과 기존 세력과의 갈등, 행정상의 혼란 등이 겹치면서 신정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 2. 지방 통치 제도
고다이고 천황은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제도를 개편하고 새로운 기관을 설치했다. 이전 시대에는 중하급 귀족들이 맡아 단순한 권익으로 변질되기도 했던 국사 제도를 지방 지배의 중추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천황의 측근이나 유력자들이 국사로 임명되어 권한 강화를 도모했다. 군사 지휘권을 담당하는 수호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사와 병치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또한, 주요 지역에는 별도의 통치 기관을 두었다.
- '''무쓰 장군부'''(陸奥将軍府): 1333년 10월,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고무라카미 천황이 될 기요라 친왕을 명목상의 수장으로 하고, 천황의 측근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그의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부자가 실질적인 보좌역을 맡았다. 장군부의 거점은 무쓰 국의 다가 성에 마련되었다.
- '''가마쿠라 장군부'''(鎌倉将軍府): 1333년 12월, 가마쿠라 막부의 중심지였던 가마쿠라에 설치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나리요라 친왕을 수장으로 하고, 당시 유력 무사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나오요시가 보좌역을 맡았다.
3. 3. 군사 정책
겐무 신정 하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기존의 비효율적인 고케닌 제도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새로운 군사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는 군역 부과를 현실에 맞게 재편하고, 천황의 직접적인 군사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전대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무사는 특권 계급인 고케닌(쇼군과 직접적인 주종 관계를 맺은 계층)과 비고케닌으로 나뉘어 있었다.[85] 고케닌 내에서도 호조 득종가를 정점으로 하는 사실상의 신분 격차가 존재했지만, 명목상으로는 "고케닌은 쇼군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원칙 때문에 제도와 실태 사이에 여러 왜곡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은 고케닌 제도와 그것에 수반되는 비효율적인 고케닌 역 시스템(고온에 대한 봉공으로서 군사력 등을 공출하는 제도)을 폐지하고, 공익·군역 부과를 보다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재편했다.[85] 또한, 고다이고는 천황가로부터 보면 배신(가신의 가신)에 지나지 않았던 고케닌을 직신으로 "격상"함으로써, 큰 영예를 준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85]
이러한 고다이고의 호의가 구 고케닌 계층에게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폐지 정책 그 자체는 사회의 실태에 맞는 합리적인 정책이었다.[85] 그 후, 다시는 가마쿠라 막부적인 고케닌 제도가 부활하는 일은 없었고, 겐무 정권이 새롭게 구축한 공익·군역 부과 시스템은 후대의 무로마치 막부에 영향을 주었다.[85]
'''연구사''': 『태평기』에서 악의적으로 묘사된 탓인지, 전후 초기의 연구에서는 사토 신이치 등에 의해, 고다이고 천황은 무사로부터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전제 군주적으로 고케닌 제도를 폐지했고, 그 때문에 구 고케닌이었던 중·상급 무사 계층으로부터 반감을 샀다고 설명되어 왔다.[85] 그러나, 2008년에 요시다 겐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사료 분석을 통해, 적어도 고다이고의 측에서는 무사를 생각하는 선의의 조치였던 것이 판명되었다.[86][85]
고케닌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지방의 무사 → 수호 → 총대장(진수부장군, 가마쿠라 장군부, 무쓰 장군부 등)이라는 명령 체계로 재편성하였다.
구분 | 기관/직책 | 담당 | 주요 인물/내용 |
---|---|---|---|
전군 지휘권 | 천황 | 고다이고 천황 | |
진수부장군 | 초기 전군 지휘 (이후 오슈 관할) | 아시카가 다카우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 |
라쿠츄 (교토 시내) | 무사소 (武者所) | 천황 친위대, 군사 관료, 추포(범죄자 체포), 반란 음모 저지 등 | 니타 요시사다, 쿠스노키 마사시게, 고노 모로나오 |
쿠보쇼 (窪所) | 천황 친위대 (궁중 요소 호위) 또는 소송 사무 담당 (※ 역할에 대한 논란 있음) | 쿠스노키 마사스에, 유키 지카미쓰 | |
다이반야쿠 (大番役) | 교토 시내 경비 (가마쿠라 막부 계승) | ||
카가리야 (篝屋) | 교토 시내 경비 (로쿠하라 단다이 계승) | ||
검비위사청 | 법원 역할 중심 (경비 임무는 거의 수행 안 함) | ||
지방 | 간토 | 가마쿠라 장군부 | 아시카가 다다요시 |
도호쿠 | 무쓰 장군부 |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 |
규슈 | 별도 기관 없음 (초기 진수부장군 다카우지 담당) | 아시카가 다카우지 |
특히 무사소(武者所)는 천황의 친위대로서, 추포(범죄자 등의 체포), 국가 전복 계획 저지(예: 사이온지 구니무네의 사건) 등 중요 임무를 담당했다. 장관에는 니타 요시사다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의향이 반영되었다는 설도 있다.[84] 현재 전하는 "무사소"의 명부는 겐무의 난 발생 후의 기록이므로, 니타 씨 파벌의 인물이 많이 보이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
쿠보쇼(窪所)는 궁중의 요소를 호위한 친위대라는 설과 소송 사무를 담당한 사무 관료라는 설이 있으며, 아직 역할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주요 인물로는 쿠스노키 마사스에, 유키 지카미쓰 등이 있다. 교토 시내 경비의 실무는 가마쿠라 시대의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이어받은 다이반야쿠(大番役)와 로쿠하라 단다이로부터 이어받은 카가리야(篝屋)가 담당했다. 율령제 하에서 본래 교토 경비 담당이었던 검비위사청은 겐무 정권에서는 경비 임무를 거의 수행하지 않고, 기본적으로는 법원으로서 활동했다.
지방 통치를 위해서는 간토 지방에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수장으로 하는 가마쿠라 장군부를, 도호쿠 지방에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를 수장으로 하는 무쓰 장군부를 설치했다. 규슈에는 별도의 전문 기관은 설치되지 않았지만, 초기에는 진수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군사를 담당했다.
3. 4. 종교 정책
중세 일본의 주요 사찰 세력으로는 현교의 사찰인 연력사, 원성사, 흥복사, 동대사와 밀교의 사찰인 연력사, 원성사, 동사(다이고사, 닌나사)가 있었다. 특히 현교 사찰들은 승병을 동원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비와호 연안의 히에이산 연력사였다. 연력사는 현교와 밀교 양쪽에 모두 속했다.고다이고 천황은 이러한 사찰 세력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연력사의 핵심 사찰인 삼문적(황족이나 귀족이 주지를 맡는 사찰)의 주지를 자신의 친족으로 임명하여 영향력을 강화했다.
사찰 | 임명된 인물 | 관계 | 비고 |
---|---|---|---|
가지이(현 삼천원) | 고료 친왕(다이토노미야) |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 후에 천태좌주, 정이대장군 |
묘방원 | 무네요시 친왕 |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 후에 천태좌주, 남조 정이대장군 |
청련원 | 지도 법친왕 | 고다이고 천황의 숙부(가메야마 천황)의 아들 | 후에 천태좌주 |
이를 통해 고다이고 천황은 무시할 수 없는 사찰의 군사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실제로 사찰 세력은 고다이고 천황을 위해 군사적으로 기여했다. 겐코의 난 당시 환속한 고료 친왕은 사찰 세력을 이끌고 치하야성 전투에서 고다이고 천황 측을 후방에서 지원하며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공헌했다. 또한 겐무의 난 때 교토 전투에서 패배한 고다이고 천황과 닛타 요시사다는 히에이산으로 피신하여 농성했는데, 이때 연력사 세력의 도움으로 2개월 동안 아시카가 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매송론』하[87]).
고다이고 천황은 삼문진언 중 하나인 동사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3. 5. 경제 정책
겐무 원년(1334년) 3월, 고다이고 천황은 "저폐"(楮幣)라 불리는 새로운 지폐 발행을 계획하고, "건곤통보"(乾坤通宝) 발행 칙서를 내렸다.[1] 그러나 이 새로운 화폐인 건곤통보는 실제로 발행되어 유통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1] 이러한 화폐 발행 계획을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시도는 기존 질서를 흔들었고, 신령(新令)에 따른 토지 소유권 문제, 쇄도하는 소송 및 은상(恩賞) 청구, 새로 설치된 기록소(記録所)나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 등 기관 간의 권한 충돌과 맞물려 경제 및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1] 이는 겐무 신정이 초기부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3. 6. 토지 정책
겐무 신정 하에서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쇼엔(荘園) 제도로 인한 복잡한 토지 소유 문제였다.[2] 당시 수호(守護)와 지토(地頭) 같은 강력한 토지 소유자들은 정치적 독립성과 면세 특권을 누리며 중앙 정부의 재정을 어렵게 하고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었다.[2] 고다이고 천황의 핵심 조언자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나, 기존의 특권을 폐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다.[2] 고다이고 천황 역시 무사 계급과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기에, 토지 문제 해결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았다.[2]겐무 신정부는 토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몇 가지 정책을 시도했다. 1333년 6월 15일, 구령회복령(旧領回復令)을 발표하여 기존 토지 소유권을 일단 무효화하고, 천황의 재결인 윤지(綸旨)를 통해서만 소유권을 인정받도록 했다. 이와 함께 사찰 영지 몰수령, 조정에 반대한 자(조적, 朝敵)의 소유지 몰수령, 잘못된 판결 재심령 등도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는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등 무사 사회의 관습법에서 인정되던 권리까지 포함하여 모든 토지 소유권의 재확인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곧바로 문제에 직면했다. 토지 소유권 인정을 받으려는 신청자들이 교토로 몰려들면서 행정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정부는 7월 제국 평균 안도령(諸国平均安堵令)을 발표하며 사실상 구령회복령을 철회했다. 이 명령은 조적의 범위를 호조씨 일족으로 한정하고 토지 소유권(지행, 知行)의 안정을 각 국아(国衙)의 국사(国司)에게 맡기는 내용으로, 기존 정책에서 후퇴한 것이었다.
이후 1334년 5월에는 쇼엔의 본가(本家)와 영가(領家) 직책 폐지, 덕정령 발포, 사찰 영향력 축소를 위한 관사 해방령 발표 등이 이어졌다. 또한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의 소송 절차를 규정하는 법령 10개 조항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겐무 신정의 토지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에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막부 타도에 협력했던 서부 지방의 무사 세력(주로 쇼엔 기반)의 반발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2] 결국 토지 소유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겐무 신정의 불안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3. 7. 기타 정책
가마쿠라 시대 말기의 사회 불안 속에서 지배층 사이에 고대 성현의 덕에 따른 개혁을 추구하는 "덕정(德政)" 사상이 퍼졌다. 이 과정에서 주자학의 새로운 해석인 성리학과 『맹자』가 조정에 확산되었다. 고다이고 천황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지묘인토 계열의 화원 천황은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이어서, 황태자 량인 친왕(후의 고곤 천황)에게 보낸 『계태자서(誡太子書)』에서 역성혁명 사상을 언급하며, 천황이라도 학문과 인정(仁政)을 소홀히 하면 지위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고다이고 천황 측에서도 측근인 요시다 사다후사, 만리코지 노부후사,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등이 앞장서 성리학과 『맹자』를 학습했으며, 이들의 글에는 『맹자』 인용이 나타난다. 공가 사회에서 이러한 덕정 사상은 주로 소송 제도 개혁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겐무 신정이 여러 방면에서 소송 제도를 정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다이고 천황은 재능 있는 인물을 등용한다는 유학 사상에 따라, 사다후사의 동생 요시다 후유카타나 중류 귀족인 히노 가문 출신의 히노 도시모토를 성리학 연구의 중심으로 발탁했다. 학문에 치중하는 경향은 다이라노 고레쓰구 등 일부 공경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신분이 높지 않은 히노 도시모토의 발탁은 경쟁 파벌의 지도자였던 화원 천황조차 현명한 인재 등용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은 선종 중에서도 선(禅)과 성리학의 일치를 추구한 송나라 시대의 선풍(禅風)을 선호하여, 슈호 묘초나 무소 소세키와 같이 일본 선종의 기틀을 다진 선승들을 등용했다. 이는 고다이고 천황이 성리학을 수용한 과정에서 이룬 중요한 문화적 공적으로 평가된다.
이 시대 성리학의 융성은 문예에도 영향을 미쳐, 『쓰레즈레구사』나 『태평기』, 렌가를 집대성한 니조 요시모토의 가론(歌論) 등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연구사'''
1965년 사토 신이치가 "고다이고 천황은 성리학을 모델로 황제 독재 정치를 시도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했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후, 모리 시게아키 등도 이를 따르면서 독재 군주론이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닛타 이치로 등이 지적했듯이 성리학 자체에는 군주 독재와 직접 연결되는 내용이 없다. 오가와 쓰요시 역시 난해한 철학 체계인 성리학과 막부 타도 운동을 직접 연결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비판했다. 성리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이 상하 신분 질서를 강조하는 명분론으로 해석된 것은 주로 야마자키 안사이 등 에도 시대 학자들에 의해서였다.[88] 또한 사토 신이치는 고다이고 천황이 성리학을 배우며 송나라의 독재 정치를 모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적 근거는 부족하다. 성리학은 송나라의 국학이 아니었으며, 중국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고다이고 천황 사후 약 30년이 지난 명나라대(1368년~1644년)부터였다. 사상사뿐만 아니라 법제사 연구에서도 1990년대 이후 진전을 통해,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이어진 흐름 속에서 점진적인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 경향은 있으나, 이를 '독재제'라고 규정할 만큼 특별한 특징은 없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4. 겐무 신정의 모순과 한계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시작한 겐무 신정은 천황 중심의 이상적인 정치를 추구했지만, 여러 내재적 모순과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불과 2년 반 만에 붕괴하였다.
신정 초기, 고다이고 천황은 광엄 천황의 즉위와 정경 연호를 부정하고 강력한 왕권 의지를 보였으나, 막부 타도의 일등공신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의 실권을 장악한 현실 속에서 불안정한 권력 구도를 형성했다. 천황은 다카우지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하기도 했다.
겐무 신정의 가장 큰 한계는 이상적인 개혁 정책과 현실 사이의 괴리였다. 기존 토지 소유권을 전면 재검토하려던 구령회복령은 전국적인 혼란만 야기한 채 제국 평균 안도령으로 후퇴하며 정책적 미숙함을 드러냈다. 새로운 화폐 발행 계획이나 무리한 궁궐 건설 추진 등도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으로 비판받으며 민심 이반을 불렀다.
무사 계급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역시 신정 실패의 주요 원인이었다. 막부 타도 과정에서는 무사들의 힘에 의존했지만, 정권 수립 후 은상 분배나 관직 임명에서 구게(公家)를 우대하며 다수의 무사, 특히 하급 무사들을 소외시켰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는 천황 이름의 한 글자를 하사하고[17] 높은 지위를 부여하면서도 점차 그의 세력을 경계하며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다카우지의 이반을 초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신설된 기록소, 은상방, 잡소결단소 등은 경험 부족과 권한 다툼으로 제 기능을 못했고, 이는 소송 처리 지연과 불공정한 은상 문제로 이어져 무사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혼란상은 1335년 니조가와라 낙서를 통해 신랄하게 풍자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호조 도키유키가 일으킨 중천의 난은 겐무 신정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난을 진압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귀경 명령을 거부하고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독자 세력화에 나섰다. 고다이고 천황이 닛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토벌을 명하면서 내란이 본격화되었고,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와 미나토가와 전투 등에서 패배한 신정군은 결국 붕괴했다. 1336년 다카우치가 고묘 천황을 옹립하여 북조를 세우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신하여 남조를 열면서 약 60년간 지속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결국 겐무 신정은 천황 중심의 복고적 이상과 무사 계급이 주도하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책적 미숙함과 내부 갈등 관리 실패로 인해 단명으로 끝났다.
4. 1. 귀족 중심 정치
고다이고 천황은 1318년 즉위 후 가마쿠라 막부의 간섭 없는 직접 통치를 목표로 삼았다.[2] 그와 측근들은 조정의 권위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가마쿠라 막부를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다.[2] 그러나 겐무 신정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쇼엔(荘園)으로 대표되는 토지 소유 문제는 심각했지만, 막부 타도에 기여한 서부 지방 무사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2] 당시 수호(守護)와 지토(地頭) 같은 거대 토지 소유주들은 정치적 독립성과 면세 혜택으로 중앙 정부의 재정을 어렵게 하고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었다.[2] 고다이고 천황의 핵심 조언자였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도 이러한 특권을 폐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했다.[2]
고다이고 천황은 과거 황실이 소유권을 잃었던 영지를 되찾아 도지나 다이토쿠지 같은 유력 사찰에 기증하며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2]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작농과 노동자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고, 이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2]
결정적으로 고다이고 천황은 무사 계급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몰수한 호조 가문의 영지를 활용하여 자신을 도운 하급 무사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관료들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였다.[2] 이는 신정 실패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 호조 영지 재분배 과정에서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같은 고위 무사들에게는 큰 보상이 돌아갔지만, 정작 전투에 참여했던 수많은 하급 무사들은 소외되었다.[2] 태평기(太平記)에 따르면, 50개가 넘는 구의 ''슈고''와 ''지토'' 직책이 귀족과 궁정 관료들에게 돌아가 무사들에게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설상가상으로, 은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된 재판소는 비효율적이었고 경험 부족과 부패 문제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2] 여기에 더해 고다이고 천황이 새로운 궁궐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사 계급에게 추가 세금을 부과하자 불만은 극에 달했다.[2] 전국적으로 귀족에 대한 적개심이 퍼져나갔고, 1335년 말에는 천황과 귀족들이 무사 계급의 지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사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인 '尊'(다카/존)을 하사하고[17] 막대한 토지와 관직을 수여하며 회유하려 했다.
구분 | 아시카가 다카우지 | 아시카가 다다요시 |
---|---|---|
이름 하사 | 고다이고 천황의 휘 尊(다카/존)을 받아 다카우지(尊氏)로 개명[17] | - |
토지 은상 | 이세 국(伊勢国) 야나기미구치(柳御厨) 등 30곳 | 사가미 국(相模国) 겐마고(絃間郷) 등 15곳 |
슈고직(守護職) | 카즈사 국(上総国), 미카와 국(三河国) (안도), 무사시 국(武蔵国), 이즈 국(伊豆国) 등 | - |
관위 | 정삼위(正三位), 진슈후 쇼군(鎮守府将軍), 좌병위독(左兵衛督), 무사시노카미(武蔵守), 참의(参議) 등 | 좌마두(左馬頭),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 싯켄(집권) |
다카우지는 형식적인 후대뿐 아니라, 전공 인정 처리[2]와 군사 지휘권[2] 등 신정의 핵심 권한에도 참여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이 무쓰(陸奥) 국과 데와(出羽) 국에 자신의 아들 노리나가 친왕을 총독으로 파견하자,[2]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는 이에 맞서 천황의 명령 없이 또 다른 황자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데려가 고즈케(上野) 국의 국사로 삼고 자신이 실권을 장악했다.[2][4] 이는 무사 계급이 문민 통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2]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모리나가 왕자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자 다카우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3][5][6] 다카우지는 미나모토씨의 후예로서 무사 통치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고,[2] 강력한 권위를 지닌 모리나가 친왕을 최대 경쟁자로 인식했다.[2] 결국 다카우지는 모리나가 친왕을 체포하여 가마쿠라에 유폐시켰고, 1335년 호조 토키유키(北条時行)가 난을 일으키자 다다요시는 가마쿠라를 탈출하기 전 모리나가 친왕의 참수를 명령했다.[5][2] 다카우지는 이 난을 진압한 후 고다이고 천황의 귀경 명령을 거부하고 가마쿠라에 머무르며[4][2] 독자적인 세력 구축에 나섰고, 이는 겐무 신정의 붕괴를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겐무 정권의 관료 구성 자체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면도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버지 고우다 천황 시대의 쿠라도(비서관) 인사를 상당 부분 계승했으며, 쇼케이(고위 귀족 관료) 임명에서도 기존 다이가쿠지통 파벌 외에 지묘인통에서 전향해 온 인물이나 실무 관료 출신을 등용하는 등 다양한 경로를 활용했다. 이는 귀족 중심의 행정 체계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무사 계급의 소외감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4. 2. 토지 정책 실패
겐무 신정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쇼엔 제도로 인한 토지 소유 문제였다.[2] 수호와 지토 같은 강력한 지방 토지 소유자들은 정치적 독립성과 면세 혜택으로 중앙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고 권위를 약화시켰다.[2]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기타바타케 치카후사도 이 문제를 인식했지만, 기득권층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2] 고다이고 천황 역시 무사 계급과 권력을 나눌 의사가 없어, 토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의지는 부족했다.[2]1333년 6월 15일, 구령회복령(旧領回復令)을 시작으로 사찰 영지 몰수령, 조적(朝敵) 소유지 몰수령, 오판 재심령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는 기존의 토지 소유 관계(고성패식목에서 인정된 지행 연기법 등 포함)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 소유권 확인 및 소송에 천황의 재가 문서인 윤지를 요구하는 급진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전국에서 신청이 쇄도하며 행정 마비가 발생하자, 7월에는 조적의 범위를 호조(北条) 가문으로 한정하고 토지 소유(지행) 안정을 각 구의 국사에게 위임하는 제국 평균 안도령(諸国平均安堵令)을 발표하며 사실상 기존 정책을 철회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과정에서 서부 지방 쇼엔 무사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이들의 기반인 쇼엔을 적극적으로 규제하기 어려웠다.[2] 대신 과거 황실 소유 영지를 회복하고 도지나 다이토쿠지 같은 사찰에 토지를 하사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소작농과 노동자의 권리가 무시되어 불만이 커졌다.[2]
결정적으로 고다이고 천황은 무사 계급, 특히 자신을 지지했던 하급 무사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막부 타도의 공신인 닛타 요시사다나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에게는 큰 보상을 내렸지만[2], 몰수한 호조 가문의 광대한 영지를 활용해 하급 무사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는 실패하고 편애에 치우쳤다.[2] 이는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혼란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2] 은상(恩賞)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치된 은상방 등은 경험 부족과 비효율, 부패로 제 기능을 못했다.[2] 태평기에 따르면, 최고위급 무사를 제외한 다수 무사들은 소외감을 느꼈는데, 50개가 넘는 구(国)의 수호와 지토 직책이 구게나 궁정 관료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3] 여기에 더해 궁궐 건축 자금 마련을 위한 추가 세금 부과는 무사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2] 귀족 사회에 대한 무사들의 적개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335년 말에는 천황과 귀족들이 무사 계급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2]
4. 3. 급진적인 개혁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온 후 광엄 천황의 즉위를 무효로 하고 정경 연호도 폐지했으며, 광엄 천황이 임명한 관직 역시 무효로 선언했다. 심지어 자신이 원홍의 변 이전에 임명했던 관백 다케다 후유노리마저 해임하며 강력한 왕권 의지를 드러냈다. 천황은 후미코지자카(富小路坂)의 별궁에서 1331년(겐코 원년)부터 자신의 재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주장하며 직접 통치(친정)를 시작했다.그러나 교토의 실권은 로쿠하라 공격을 주도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장악하고 있었다. 다카우지의 세력을 경계한 고라 친왕이 신기산을 거점으로 견제하려 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타협책으로 6월 13일 모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했다.
6월 15일에는 구령회복령(旧領回復令)이 발표되었고, 연이어 사찰 영지 몰수령, 조적(朝敵) 소유지 몰수령, 오판 재심령 등이 내려졌다. 이는 기존의 토지 소유권(예: 고세이바이시키모쿠에서 인정된 지행 연기법)을 일시적으로 무효화하고, 토지 소유권 및 소송 신청에 천황의 재결인 윤지(綸旨)를 받도록 한 급진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토지 소유권 인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수도로 몰려들어 물리적으로 재판이 불가능해지자, 7월에는 조적의 범위를 호조씨 일족으로 한정하고 지행의 안도를 각 구니의 고쿠시에게 맡기는 제국 평균 안도령(諸国平均安堵令)을 발표하며 사실상 이전 명령을 철회했다.
8월 5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 '다카하루(尊治)'에서 한 글자를 받아 '다카우지(尊氏)'로 개명하고, 이후 진수부장군에 임명되었다.
새로운 통치 기구로 기록소(記録所), 은상방(恩賞方), 그리고 9월에는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가 설치되었다. 간토와 도호쿠 지방 통치를 위해 10월에는 측근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그의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고무라카미 천황을 받들고 무쓰국으로 파견되어 무쓰 쇼군부(陸奥将軍府)가 세워졌다. 12월에는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나리요시 친왕을 받들고 가마쿠라로 파견되어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가 성립되었다.
겐무 원년(1334년) 정월에는 쓰네요시 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연호가 '겐무'로 정해졌다. 같은 해, 천황의 새로운 황궁인 다이나이리(大内裏)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고, 이를 위한 재원 마련을 목적으로 이십분의 일 세와 같은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고 토지 조사가 실시되었다. 또한 '저폐(楮幣)'라 불리는 새로운 지폐 발행이 계획되어 3월에는 '건곤통보(乾坤通宝)' 발행 칙서가 내려졌으나, 실제 주조 및 유통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무렵부터 새로운 법령으로 인한 토지 소유권 분쟁, 쇄도하는 소송 및 은상 청구, 신설된 기관들 사이의 권한 다툼 등으로 인해 신정(新政)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5월에는 장원제의 근간이었던 본가(本家)직과 령가(領家)직이 폐지되었고, 덕정령과 사찰을 국가 통제 하에 두려는 관사 해방령(官社解放令)이 발포되었다. 또한 잡소결단소의 소송 절차를 규정한 10개 조항이 제정되었다. 한편, 정이대장군 직에서 해임되고 정권 내 영향력을 잃은 모리요시 친왕은 무력으로 다카우지를 타도하려 했다는 혐의로 10월에 체포되어 가마쿠라로 유배되었다. 12월에는 팔성경(八省卿) 등 주요 관직에 가문의 격식(가격)보다는 실력을 중시하는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되었다.
겐무 2년(1335년) 5월에는 궁궐 건설을 위한 조내리 행사소(造内裏行事所)가 설치되는 등, 고다이고 천황은 혼란 속에서도 개혁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은 기존 질서에 익숙했던 무사 계층과 귀족들의 반발을 샀으며, 사회·경제적 혼란을 심화시켜 신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5. 겐무 신정 이후
겐무 신정은 고다이고 천황의 천황 중심 정치 복귀 시도였으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붕괴하였다. 특히, 무사 계급의 지지를 얻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대립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다카우지는 1336년 교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했으며,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신하여 남조를 세웠다. 이로써 일본은 약 60년간 지속되는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겐무 신정의 붕괴는 무가 정권의 재등장을 가져왔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북조로부터 정의대장군에 임명되어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비록 겐무 신정 자체는 단명했지만, 이 시기에 시도된 일부 개혁(예: 고케닌 제도 폐지)은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제도 정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겐무 신정 이후의 역사는 남북조의 대립과 새로운 막부 체제의 성립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5. 1. 남북조 시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 조정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닛타 요시사다의 고향인 고즈케국의 수령직에 우에스기 씨 일원을 임명하는 등 광범위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2] 이에 1335년 말, 고다이고 천황의 군대가 가마쿠라로 진군할 준비를 마쳤고, 코노 모로야스가 이끄는 다카우지 측 군대도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동했다.[2] 1335년 11월 17일,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형의 이름으로 전국의 사무라이들에게 아시카가 가문에 합류하여 닛타 요시사다를 토벌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2] 반면 조정은 모든 지방의 사무라이들에게 요시사다에게 합류하여 아시카가 형제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사무라이들은 다카우지가 자신들의 불만을 해소해 줄 인물이라고 여겼고, 농민들 사이에서도 막부 시대가 더 나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2] 이로 인해 전투는 아시카가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다카우지 형제에게 합류했다.[2] 결국 1336년 2월 23일, 닛타 요시사다와 천황군은 패배하고 교토는 함락되었다.[2] 이틀 뒤인 2월 25일,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수도 교토에 입성하면서 겐무 신정은 막을 내렸다.[2]
겐무(建武|けんむ일본어) 연호는 사용 기간 계산 방식이 두 가지로 나뉘는 특이한 사례이다. 일본 연호(年號, 年号|넨고일본어)는 일반적으로 천황의 즉위와 함께 바뀌지만, 1336년 이후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남조와 북조가 겐무 연호의 사용 기간을 다르게 계산했다. 겐무는 겐코(元弘) 다음의 연호로, 남조는 1334년부터 엔겐(延元) 연호가 시작되는 1336년까지 사용했다고 보았다. 반면, 북조는 1334년부터 랴쿠오(暦応) 연호가 시작되는 1338년까지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남조가 결국 패배했지만 정통성을 인정받기 때문에, 현대 역사학에서는 남조의 연호 계산 방식을 따른다.
겐무 신정이 무너지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자신이 옹립한 광명 천황으로부터 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열었다. 막부 초기에는 남북조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15세기 이후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막부의 실질적인 지배력은 교토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아시카가 가문은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추방될 때까지 15대에 걸쳐 무가 정권을 유지했다.
5. 2. 무로마치 막부
이전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무사 계급이 쇼군과 직접 주종 관계를 맺은 고케닌과 그렇지 않은 비고케닌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케닌 내부에서도 호조 득종가를 정점으로 한 사실상의 신분 격차가 존재했지만, 명목상으로는 "고케닌은 쇼군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원칙이었기 때문에 제도와 현실 사이에 여러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고다이고 천황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케닌 제도와 그에 따른 비효율적인 고케닌 역(고온에 대한 봉공으로 군사력 등을 제공하는 제도) 시스템을 폐지했다. 대신 공익과 군역 부과를 보다 효율적이고 현실적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통해 기존에 쇼군의 가신에 불과했던 고케닌들을 천황의 직속 신하로 "격상"시켜 큰 영예를 주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폐지 정책 자체는 당시 사회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고다이고 천황의 호의가 구 고케닌 계층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정책 이후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고케닌 제도는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겐무 정권이 새롭게 구축한 공익 및 군역 부과 시스템은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제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구사''': 과거 사토 신이치 등은 『태평기』의 묘사에 영향을 받아, 고다이고 천황이 무사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전제적으로 고케닌 제도를 폐지했고 이로 인해 중·상급 무사들의 반감을 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8년 요시다 켄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친서 분석을 통해, 적어도 천황 본인은 무사를 위한 선의의 조치로 개혁을 추진했음을 밝혔다.
6. 겐무 신정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겐무 신정은 고다이고 천황의 왕정복고 시도로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고다이고 천황은 인세이나 셋쇼·간파쿠 등을 두지 않고 정치 권력의 일원화를 추구하며 개혁을 시도했다. 이러한 개혁 중 일부, 예를 들어 공가령의 적장자 계승 원칙[85]이나 잡소결단소 운영 등은 후대 무로마치 막부에 영향을 미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21세기 들어서는 겐무 정권의 법 제도가 가마쿠라 시대의 제도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는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신정은 당시부터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1335년에는 이를 풍자하는 니조 가와라 낙서가 등장했으며,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나 그의 아버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같이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했던 인물들조차 신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훗날 산조 긴타다는 신정의 조치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겐무 신정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후대에 미친 영향과 당시의 혼란상으로 인해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6. 1. 긍정적 평가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매송론』(梅松論)에서 "지금의 관례는 옛날의 새로운 규범이다. 짐(朕)의 새로운 규범은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겐무 정권은 인세이(院政)를 시행하지 않았고, 셋쇼(摂政)・간파쿠(関白)나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등을 두지 않았다. 이는 고우다 천황 등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이어진 정책 방향을 따라 점진적으로 정치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의도였다. 정이대장군은 앞서 언급된 대로 모리요시 친왕이 임명되었으나, 셋쇼와 간파쿠는 겐무 신정 기간 동안 끝내 임명되지 않았다. 다만 니조 미치히라와 고노에 쓰네타다를 나이란(内覧)에 임명했다.
20세기까지는 겐무 신정이 급진적인 악정(惡政)이었다는 평가가 주류였으나, 1998년 이토 기요시(伊藤喜良)의 논문 발표 이후 21세기 현재에는 겐무 정권의 법 제도가 가마쿠라 시대의 제도를 점진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시작한 정책 중 일부는 후대의 선례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공가령(公家領)의 분할을 제한하고, 가독(家督)·가기(家記)·저택 등으로 구성된 '가몬(家門)'과 소유 영지인 '가료(家領)'를 일괄적으로 안도(安堵, 소유권 인정)하여 적장자에게 계승시키는 방침을 내세운 것을 들 수 있다. 이 원칙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치텐노키미(治天の君)로 추대된 북조의 고곤 상황 아래에서도 계승되어, 공가의 가독 및 소유 영지를 치텐노키미 또는 천황의 안도를 거쳐 적장자가 단독으로 계승하는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85]
또한,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의 첩(牒, 명령서. 무로마치 막부의 시행장(施行状)에 해당)을 통해 소송 절차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관위(官位)를 조고(成功, 사찰이나 신사 기부의 대가로 관직을 얻는 것)가 아닌 은상(恩賞)으로 수여하는 제도 등 많은 요소가 무로마치 막부에 '선례'로서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6. 2. 부정적 평가
1335년 8월에는 겐무 신정을 풍자하는 내용의 니조 가와라 낙서가 등장하는 등 신정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338년에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거병하기 전에 고다이고 천황에게 신정의 실패를 지적하며 문제점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또한 그의 아버지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저술한 『신황정통기』를 비롯하여 당시 여러 구게(公家)들이 남긴 일기에도 신정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는 무사 계급이나 일반 서민들뿐만 아니라, 나중에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서 북조와 대립했던 기타바타케 부자와 같은 구게들조차 신정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훗날 구게였던 산조 긴타다는 "고다이고인(고다이고 천황)의 조치는 마치 미친 사람의 행동과 같은 것이 많아, 좋은 선례가 되지 못한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6.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우메마쓰론에 기록된 "今の例は昔の新義なり、朕が新儀は未来の先例たるべし|이마노 레이와 무카시노 신기나리, 친가 신기와 미라이노 센레이타루베시일본어" (지금의 관례는 옛날의 새로운 규범이며, 짐의 새로운 규범은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하며 개혁 의지를 보였다.겐무 정권은 인세이를 실시하지 않았고, 셋쇼·간파쿠나 세이이타이쇼군 같은 직책을 두지 않으며, 고우다 천황 등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이어진 정책 방향에 따라 점진적으로 정치 권력의 일원화를 목표로 했다. 세이이타이쇼군에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모리요시 친왕을 임명했으나, 셋쇼와 간파쿠는 겐무 신정 기간 동안 끝내 임명하지 않았다. 다만 니조 미치히라와 고노에 쓰네타다를 나이란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1335년 8월에는 신정을 풍자하는 니조가와라 낙서가 등장했으며, 1338년(엔겐 3년/겐무 5년)에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거병 전에 신정의 실패를 지적하는 간언을 올렸다. 또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나 다른 공가의 일기 등에도 신정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기록되어 있어, 무사나 서민뿐만 아니라 고다이고 천황 측근이었던 기타바타케 부자와 같은 공가조차 신정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산조 긴타다는 "고다이고인의 조치는 미친 짓이 많아 선례가 될 수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시작한 정책 중 일부는 후대의 선례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공가령의 분할을 제한하고, 가독·가기(家記)·저택 등으로 구성된 '가문'과 소유 영지인 '가령'을 일괄적으로 안도(安堵, 소유권 확인 및 보증)하여 적장자에게 계승시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이 원칙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지텐노키미로 추대된 북조의 고곤 상황 아래에서도 계승되어, 공가의 가독 및 소령을 지텐노키미 또는 천황의 안도를 거쳐 적장자가 단독으로 계승하는 원칙이 정착하는 데 기여했다.[85]
20세기까지 겐무 신정은 급진적인 악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1998년 이토 기라의 연구 이후 21세기 들어서는 겐무 정권의 법 제도가 가마쿠라 시대의 제도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집대성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잡소결단소의 첩(牒, 명령서. 무로마치 막부의 시행장에 해당)을 통해 소송 절차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고, 관위를 成功|조고일본어(사찰 등에 대한 기부의 대가로 관직을 얻는 것)이 아닌 은상으로 수여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많은 요소가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 '선례'로서 계승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7. 연표
- 겐코(元弘) 3년/쇼케이(正慶) 2년(1333년)
- * 5월 22일(서력 7월 4일) - '''겐코의 난(元弘の乱)도쇼지 합전(東勝寺合戦)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멸망.'''
- * 5월 25일 - 광엄 천황(光厳天皇)을 폐하고, 연호를 겐코로 통일[8].
- * 6월 5일(서력 7월 17일) -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입경하여,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을 개시[9].'''
- * 같은 날 -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 다카우지)를 진슈후 쇼군(鎮守府将軍)에 보임(『아시카가 관위기(足利官位記)』[17]).
- * 6월 8일 - 신정 후, 처음으로 기정(공경회의)을 실시[10].
- * 6월 12일 - 전 우대신(右大臣)쿠가 나가미치(久我長通)·전 내대신(内大臣)도인 공현(洞院公賢)·전 참의(参議)보몬 키요타다(坊門清忠)를 환임, 우대신(右大臣)코노에 쓰네타다(近衛経忠)·권대납언(権大納言)사이온지 공소(西園寺公宗)를 파면, 만리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를 안찰사·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를 탄정대필(弾正大弼)·아시카가 다카우지(다카우지)를 좌병위독(左兵衛督)·아시카가 다카요시(足利直義)를 좌마두(左馬頭)에 승임[11].
- * 6월 13일 - 고라 친왕(護良親王)이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보임된다[12].
- * 6월 20일 - '''정시(政始)(まつりごとはじめ), 신정 후 처음으로 외기정(外記政)(가장 공식적인 회의)'''(『시슈키(師守記)』정치 2년 2월 13일 조[13]).
- * 7월 19일 전후? - 온쇼호(恩賞方)가 설치된다(『슈코몬쇼(集古文書)』[14]에 기반한 하세가와설). 8월설도 있다[15][16].
- * 8월 5일 - 서위(叙位)조목(除目)(겐코의 난의 논공행상),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존(尊)」의 편휘를 수여,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니타다 요시사다(新田義貞)·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치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등도 관직을 얻는다[17].
- * 9월 10일? -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가 설립되고(잡소결단소#성립시기도 참조), 동시기에 와쿠쇼(窪所)·무사쇼(武者所) 등도 설치, 기록소(記録所)도 재흥된다[18].
- * 9월 중? - 고라 친왕이 정이대장군의 직을 떠난다[12].
- * 10월 20일 -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기요라 친왕(후의 고무라카미 천황(後村上天皇))을 봉하고, 아버지 키타바타케 친보(北畠親房)와 유키 소우히로(結城宗広)와 함께 오슈(奥州)로 향한다(소위 오슈 쇼군후(陸奥将軍府)의 시작)[19].
- * 12월 11일 - 다이코우지 합전(大光寺合戦), 다이코우지 성(大光寺城)(현재의 아오모리현(青森県)에 소재)에서 이듬해까지 호조씨 잔당과의 전투[20].
- * 12월 24일 - 아시카가 다카요시가 나리아키 친왕(成良親王)을 봉하고, 가마쿠라로 출발(소위 가마쿠라 쇼군후(鎌倉将軍府)의 시작)[21].
- 겐무(建武) 원년(1334년)
- * 1월 23일 - 츠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을 입태자로 삼다[22].
- * 1월 29일(서력 3월 5일) - '''겐무(建武)로 개원[23].'''
- * 1월 중 - 잡소결단소의 조규가 정해진다[24].
- * 1월 중 - 오슈식 평정중, 인부, 제봉행의 설치[25].
- * 1월 중 - 칸토 소우반(関東廂番)의 설치[26].
- * 3월 17일 - 제국 피폐 때문에, 2년간, 쇼엔(荘園)의 검주(検注)를 멈추는 것을 명령한다(단, 실시되지 않았다)[27].
- * 3월 28일 - 간콘츠보(乾坤通宝)의 신전 및 저폐(지폐)의 발행을 정한다[28].
- * 5월 3일 - 검비위사청(検非違使庁)이 덕정령(徳政令)을 발포한다[29].
- * 5월 18일 - 온쇼호(恩賞方) 4번을 정하고, 기록소(記録所) 기인을 두고, 잡소결단소의 조규를 정한다[30].
- * 8월 10일 - 이 날, 나카미카도 노부아키(中御門宣明)가 주전장관에 임명되고, 후일, 고죠 요리모토(五条頼元)가 주전차관에 임명된다[31].
- * 8월 중 - 잡소결단소를 8번으로 확충한다[32].
- * 10월 5일 - 공경 만리코지 후지후사(万里小路藤房)가 출가한다[33].
- * 10월 22일? - '''고라 친왕(護良親王)이 체포되어 실각'''(『매송론(梅松論)』)(10월 30일설(『호력간기(保暦間記)』), 11월 3일설(『다이죠인 일기목록(大乗院日記目録)』)도 있다)[34].
- * 10월 중 - 키이국(紀伊国) 이네모리산(飯盛山)에서 반란,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부하를 파견하여 진압에 당한다[35].
- * 같은 달 중 - 신세 「20분의 1세」가 행해진 사료상의 확실한 초견[36].
- * 11월 15일 - 고라 친왕이 가마쿠라로 유배된다[37].
- * 12월 30일 - 아시카가 다카쓰네(足利高経)(시바 다카쓰네)가 키이 이네모리 성 반란에 대장으로서 당하고, 반란군에 패배한다[38].
- 겐무 2년(1335년)
- * 1월 29일 - 아시카가 다카쓰네(시바 다카쓰네)가 키이 이네모리 성 반란의 진압에 성공한다[39].
- * 1월 중 - 승관(僧官)의 관위상당(官位相当)을 정한다[40].
- * 2월 5일 - 시나노국(信濃国)에서 호조씨 잔당과의 작은 소규모 충돌, 7월의 중세대의 난의 전조[41].
- * 2월 중 - 잡소결단소의 조규를 정한다[42].
- * 3월 17일 - 전주(伝奏)와 기록소의 결번(結番)(케치반, 당번의 날과 규칙) 및 기록소의 식일을 정한다[43].
- * 6월 15일 - 조대내리(大内裏)행사소시[44].
- * 6월 22일 - 대납언(大納言)사이온지 공소(西園寺公宗)의 모반이 발각되어,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다카 모리나오(高師直)에게 체포된다[45].
- * 7월 14일 - '''호조 토키유키(北条時行),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 등 호조씨(北条氏) 잔당이 결기, 중세대의 난(中先代の乱) 발발[46].'''
- * 7월 22일 - 아시카가 다카요시가 호조 토키유키에게 패퇴한다[47].
- * 7월 23일 - 가마쿠라에 유폐 중인 고라 친왕(護良親王)이 살해된다[47].
- * 7월 25일 - 호조 토키유키가 가마쿠라에 입성한다[48].
- * 8월 2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중세대의 난에 참전, 정이대장군위를 원하지만 허락되지 않고, 후에 정동장군(征東将軍)에 임명된다[49].
- * 8월 18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호조 토키유키를 사가미가와(相模川)에서 격파한다[50].
- * 8월 19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를 탈환, 중세대의 난 종결[50].'''
- * 8월 30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종이위(従二位)에 승서한다[51].
- * 8월 중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온쇼를 독자적인 권한으로 점차 배포하기 시작한다[52]. 30일, 다카우지가 시바 이에나가(斯波家長)에게 오슈 간료(奥州管領)의 지위를 준다[53].
- * 8월 중 - 『니죠가와라의 낙서(二条河原の落書)』에 의한 세상 풍자[54].
- * 9월 27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대대적으로 독자적인 재량으로 온쇼를 배포하기 시작한다'''[55].
- * 10월 11일 이전 - 임제종(臨済宗) 고승 무쇼 소세키(夢窓疎石)에게 「무쇼 국사(夢窓国師)」의 국사호를 준다[56].
- * 10월 15일 이전 - 츄인 구미츠(中院具光)를 가마쿠라에 파견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귀경을 재촉하지만, 아시카가 다카요시의 진언에 의해 거부된다[57].
- * 10월 15일 - 가마쿠라(鎌倉)와카미야 오도리(若宮大路)의 구 쇼군가 터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고쇼가 완성되어, 다카우지는 동소에 천거한다[57].
- * 11월 2일 - 아시카가 다카요시(足利直義)가 니타다 요시사다를 토벌한다고 하여 제국의 병사에게 집합 명령을 건넨다[58].
- * 11월 12일 -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가 진슈후 쇼군(鎮守府将軍)이 된다[59].
- * 11월 18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칭하고, 니타다 요시사다를 토벌하는 것을 청하는 서장이 교토에 도착한다[60].
- * 11월 19일(서력 1336년1월 2일) - '''겐무의 난(建武の乱) 발발. 아시카가 다카우지 토벌이 발하여지고, 다카요시 친왕(尊良親王), 니타다 요시사다(新田義貞), 쇼왕(ショウ王), 도인 사네요시(洞院実世) 등이 출진한다[61].'''
- * 11월 22일 - 다카우지 토벌을 위해 제국의 병사에게 집합 명령을 건넨다[62].
- * 11월 25일–27일 - 야하가와 전투(矢作川の戦い)[63]. 겐무 정권의 승리.
- * 11월 26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다카요시의 관작을 박탈한다[64].
- * 12월 5일 - 테고시가와라 전투(手越河原の戦い)[65]. 겐무 정권의 승리.
- * 12월 11일 -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箱根・竹ノ下の戦い)[66]. 아시카가측의 승리.
- * 12월 22일? - 키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가 오슈에서 교토로 급진을 시작하고, 도중, 아시카가측의 가마쿠라 주류 부대를 격파한다[67].
- 엔겐(延元) 원년/겐무(建武) 3년(1336년)
- * 1월 초두 - 제1차 교토 합전(第一次京都合戦) 개시.
- * 1월 10일 - 고다이고 천황이 비에이산(比叡山)으로 도망쳐, 오오미야 히간쇼(大宮彼岸所)를 행궁으로 한다[68].
- * 1월 11일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입경, 겐무 정권의 유키 친미츠(結城親光)가 아시카가측의 오오토모 사다니(大友貞載)와 상타치하여 전사한다[69].
- * 1월 13일 -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겐무 정권 본군에 합류한다[70].
- * 1월 30일 - 제1차 교토 합전이 겐무 정권측 승리로 종결[71],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에 환행한다[72].
- * 1월 중 - 「후의 삼방(後の三房)」의 한 사람 만리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와 「미키 일초(三木一草)」의 한 사람 치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등 중신이 출가한다(이유 불명)[73].
- * 2월 6일 - 겐무 정권의 쿠스노키 마사이에(楠木正家)가 히타치국(常陸国)에서 아시카가측의 사타케씨(佐竹氏)를 격파한다[74].
- * 2월 10일–11일 - 우치데·토요시마가와라 전투, 겐무 정권의 승리, 아시카가측은 규슈로 도망친다[75].
- * 2월 29일 - '''엔겐(延元)으로 개원[76].''' 아시카가측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겐무의 사용을 계속한다.
- * 같은 날 - 규슈에서, 아시카가측의 코니 사다쓰네(小弐貞経)가 겐무 정권의 키쿠치 타케토시(菊池武敏) 등에게 패배하여 자살한다[77].
- * 3월 2일 - 타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 키쿠치 타케토시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 아시카가측이 다자이후(太宰府)를 장악한다[78].
- * 5월 25일(서력 7월 4일) - 미나토가와 전투(湊川の戦い), 아시카가측의 승리, 겐무 정권의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전사[79].
- * 6–8월 - 제2차 교토 합전(第二次京都合戦). 아시카가측의 승리. 겐무 정권의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 치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전사.
- * 8월 15일 - 아시카가측에 의해 옹립되어, 지묘인토(持明院統)(후의 북조(北朝))의 고텐 천황(光明天皇) 즉위[80].
- * 9월 중순–29일(서력 10월 하순–11월 3일) - 오미 전투(近江の戦い)[81]. 아시카가측의 승리.
- * 10월 10일(서력 11월 13일) -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의 난에 패배하여 투항, 겐무 정권의 종언[82].'''
- * 12월 21일(서력 1337년1월 23일) -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吉野)로 천행, 남북조 시대로[8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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